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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일상

1. 졸업하고, 고등학교 기숙사 입사를 이틀 앞두고 있다. 워낙 먼 학교로 배정을 받아서 걱정했는데 기숙사반 합격 덕에 일단 통학 걱정은 한 학기 동안 던 셈이다만.. 결코 그 생활이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다. 이럴 때면 결과론적인 사고 방식을 택해 내 자신을 위로해 보기도 한다. '일단 좋은 대학은 들어가야 하니깐'하고. 그리고 이제부턴 그런 생활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한 내공을 쌓으려 노력해야겠지 싶다.

2. 계획을 지키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계획을 세울 때와 실천해야 할 때의 내 마음가짐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더군. 어느새 지금은 나 자신에게 적당한 핑계를 들어 세워둔 계획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질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3. 요즘은 트위터보다 네이트온, 싸이월드, 혹은 페이스북과 같은 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후자 서비스들은 내가 주로 현실의 관계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변화의 이유는 뭘까? 내가 흔히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는 상당히 피상적이어서가 아닐까. 피상적인 온라인의 관계에 싫증을 느끼고 좀 더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현실의 관계로 돌아선다, 꽤나 있을 법한 이유지 싶다.

졸업 일상

오늘은 내게 있어서의 첫 번째 졸업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땐 집안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참석을 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그런지 내게 오늘은 다른 아이들보다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생애 처음의 졸업식이자, 입시전쟁으로의 새로운 한 걸음. 마냥 아쉬워하면서도, 앞으로 내게 펼쳐질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졸업식 내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무렵, 어느새 졸업식 노래 제창의 순서가 왔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졸업식 예행 연습을 하던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틀에 박힌 순서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막상 오늘에 와서 다시 부르게 되니 갑작스레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 옆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도 내일부터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 테고. 그러면서 후회도 밀려왔다. 좀더 다가갈 걸, 좀더 잘 대해 줄 걸… 그러나 아무리 아쉬워해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법. 졸업식은 끝났고, 난 지금 추억을 회상하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3년 동안, 평생 중학생일 것처럼 살아왔다. 이별이 있으리란 걸 알고도 친구들과 평생 함께 할 것처럼 살아왔다. 이별은 또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별은 쉬운 게 아니다. 여태껏 학교를 같이 다녀왔던 우리들이, 졸업을 이유로 당연한 듯 헤어지는 게 내가 어려서인지, 너무 슬픈 일으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슬퍼할 수도 없잖아'하고 날 위로해 본다.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그리고 여기에나마 마지막 인사를 던진다. 안녕, 서경중학교. 3년 동안 정말 고마웠고, 진심으로 사랑해.

체벌전면금지에 대한 단상 단상

서울시 곽노현 교육감의 체벌전면금지 이후로 어느새 두 달이 흘렀다. 그 두 달 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고, 언론에서도 이 토픽을 화두 삼아 수많은 기사를 써 왔다. 김대중 대통령 때의 체벌전면금지 이래로, 체벌에 대한 이 정도의 적극적인 사회적 공론화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의견을 내는 만큼, 아직도 찬반 대립의 갭은 좀체 좁혀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학생으로서, 난 부족하게나마 이번 일에 대해 내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한다.

우선, 인터넷에서 체벌에 관하여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을 둘러 보면 아직도 체벌≠폭력을 전제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 '체벌은 폭력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난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군대에서의 구타와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아마 돌아오는 답변은, 미성년자의 미성숙함을 근거로 체벌과 그 두 가지 사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식의 내용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미성년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을 미성숙이라는 새장 안에 가두고, 그들도 인권의 수혜 대상이라는 걸 잊고 있지는 않은지. 물론 미성년자들의 미성숙함을 부정하진 않는다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는 성인이 있다면 그에게도 '미성숙'을 근거로 체벌을 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문제에 다른 대책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성년자임에도 성인 못지 않게 성숙한 학생이 있기 마련이고, 성인임에도 미성년자 못지 않게 미성숙한 학생이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나이 차를 잣대로 내세워 체벌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개인차를 무시한, 안일하기 그지없는 발상 이상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위의 두 사례와 같이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도출해낼 수 있다.

두 번째로, 체벌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 난 체벌을 교육적 의미에선 '가장 즉각적이고, 가장 피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체벌은 단순히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표면적인 교정을 불러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절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체벌로 학생들을 계도하는 것은 공포에 굴복시키고 정작 잘못을 깨닫게끔 하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흔히 말하여지는 '폭력의 대물림'이 발생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떠한 형태로든 폭력의 공포를 겪어온 사람들은 사회 내에서의 폭력성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동조하기에 이르기 쉽다. 또한 일각에서는 '학교에서의 체벌조차 겪지 못하면, 사회의 더한 폭력에 맞설 수 있겠는가'하는 말도 나오는 듯 하나, 되려 이러한 생각이 폭력의 대물림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체벌은 가장 비인간적이면서도 교육적 효과조차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체벌전면금지에 따르는 대안에 대해. 체벌전면금지는 너무도 상처받아버린 학생들의 불가침권리를 되찾아 주자는 건데, 대안의 부재 때문에 이를 미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난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과연 그것이 학생들의 인권을 더 오래 쥐고 흔드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가?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 때의 전면적 체벌금지 때도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해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교육 현장에선 대책이 없다는 말만 번복하며 체벌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오진 않았던가? 자기 권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나가는 학생들에다 대고 '교실붕괴'니, '통제불능'이니 하며 튀어나오는 불만들은 되려, 얼마나 학생들이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들이 정말 교권을 원한다면, 우선 그들이 체벌로서 부여받는 권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진 일상

괜시리 사진 찍는 게 좋아지는 요즘.

대학생이 되면 여행 다니면서 사진 찍는 걸 취미 삼고 싶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단상

한국에 살면서 이 말을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만큼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또 그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 받은 말이다. 다만 난 오늘날 흔히 쓰이는 이 말의 왜곡된 용도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어 왔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불만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 대상이 학교가 될 수도 있고,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정당한 사유에서일 수도 있고, 단순한 반항심과 치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불만을 내뱉을 때마다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즉 집단에 대해 개인이 불만을 표출할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셈인데, 이것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억압이자 집단주의적인 색이 상당히 짙게 배어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도 말한 '단순한 반항심과 치기에서 비롯된' 불만이라면 중은 절에서 나가거나 좀 더 깊은 정신적 수양이 요구될 법 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절은 그 불만의 사유를 중과 함께 파악하고, 싫지 않은 절을 만들기 위해 궁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만을 발전의 시발점으로 삼아 보자. 그렇게 사회는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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